내가 살고 있는 집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큰방 – ‘room+pen’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나 귀찮아서 아직 한번도 다른 이에게 소리내어 말해 본 적은 없다. 일종의 침실 겸 서재(라기보단 책을 쌓아놓는 곳). 가끔 운이 좋으면 섹스를 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작은방 – ‘studio *cookbook of sound*’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나 발음하기에 너무 긴데다 약자 역시 예쁘지 않아 (무려 ‘스쿡오사’) 그냥 작업실이라 부른다. 자주 운과 상관없이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장소로 쓰인다. 하드디스크가 이곳에 있고 21세기의 마스터베이션은 하드디스크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얼마 전 24인치 모니터를 구입한 후론 그 활용도가 더욱 높아졌다.
주방 – 방이라기보단 통로의 개념이라 아무런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이곳은 나보다 바퀴벌레들이 더 자주 이용하므로 이름이 있다면 아마도 그들이 붙였을 것이다. 이곳에선 섹스도 마스터베이션도 하지 않았다. 섹스는 정말 운이 좋을 때 한번 해 볼 계획이다. 그 전에 에이프런 앞치마를 구입해두어야 겠지.
욕실 – 문 앞에 ‘toilet women’이라 적혀 있는 여성용 화장실 표지판이 붙어 있다. 집에 여성이 자주 드나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붙여 두었으나 통계를 내어보니 이용하는 이는 99.1%의 비율로 남성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얼마전에서야 집에 여성이 자주 드나들게 하기 위해선 화장실에 여성용 화장실 표지판을 붙여놓는 것보단 깨끗한게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대청소를 감행했으니 아마 현재는 집의 각 파트 중 가장 깨끗하지 않을까 싶다. (나머지 장소는 대부분 소청소 그리고 어쩌다 중청소를 해줄 뿐이다.) 언젠가 집에 친구가 놀러오는 일이 있으면 이곳에서 재워 그 깨끗함을 증명할 예정이다.
현관 – 집안을 기준으로 좌측으로는 신발장과 보일러가 우측으로는 창고가 있다. 좌측에는 이제는 신지 않는 신발이 열켤레 정도 신발장에 들어가 있고 우측으로는 자전거와 재활용 종이 쓰레기를 담아둔 박스 그리고 미처 자리를 찾지 못한 만화책이 쌓여 있다. 현관문의 일부가 공개되어 있으므로 이곳은 정부에서 누드 현관으로 지정한다 하더라도 섹스는 풍기문란죄 구속의 위험 때문에 할 수 없다. 하지만 마스터베이션은 좀 애매할 것 같다. 경찰이 찾아 오면 너무 가려워 좀 격렬하게 긁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이 중 티비 리모콘이 쓰이는 장소는 큰방이다. 그곳에 티비가 있고 티비 리모콘은 티비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비 리모콘은 주방에서 혹은 작은방에서 심지어는 냉장고나 가방 안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되기도 한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전자의 두 경우는 꽤 자주 있는 편이며 후자의 두 경우 역시 종종 있는 편이다. 즉, 티비 리모콘은 자주 본래 있어야 할 곳을 이탈하는 편이다. 혹시 티비 리모콘에게 자유의지라도 있어 내가 보지 않는 사이 방 이곳저곳을 노다니는 걸까. 그렇다면 그간 암암리에 전해져 왔던 티비 리모콘은 수동적인 존재라는 (그리고 그것을 쓰는 이 역시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과학적/철학적 사실이 부정되는 셈이다. 티비 리모콘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큰 사회적 혼란을 낳을테고 (내가 섹스하는 것을 저 녀석이 모두 보고 있었단 말인가!) 마이클 베이 감독은 트랜스포머 다음편의 주인공으로 티비 리모콘을 캐스팅할텐데 아무도 티비 리모콘이 주인공인 영화는 보고 싶어하지 않을테니 일단 그럴 가능성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그렇다면 결국 티비 리모콘 방랑 대소동은 모두 내 소행인 셈이고 일련의 경험들(매번 각기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는 외출용품-지갑,열쇠,아이팟 등)을 바탕으로 나는 깔끔히 그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한가지 사실을 인정한김에 다른 한가지 사실에 대해 얘기하자면 사실 내가 이 글을 쓰려고 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위해서였다. ‘제자리에 놓여져 있지 않는 리모콘을 볼 때마다 내 삶 역시 제자리에 놓여져 있지 않은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멋드러진 문장으로 마무리를 짓기엔 저질스럽고 불필요한 유머가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남발됐으며 이 포스트를 본 사람들이 며칠 뒤 이 포스트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면 남아 있는 키워드는 ‘섹스’, ‘마스터베이션’ 뿐일테니 결국 나는 내가 하려던 말을 전하는데 실패한 셈이다. 하지만 어쩌면 저 단순한 문장 하나 제자리에 놓지 못했다는 사실이야 말로 내 삶이 (적어도 메모장 위에서는) 제자리에 놓여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 리모콘의 버튼 역시 제대로 된 자리에 놓여져 있는 걸로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