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다음 예문을 읽고 ()안에 들어갈 적합한 문장을 고르시오. (행운의 7지선다형 객관식 문제)
daft punk는 얼굴 땀띠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 헬멧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a:1.글로벌 헬멧그룹 HJC의 후원계약 때문에
2.소년중앙에 나왔던 michael jackson 음모론처럼 자신의 가짜에게 대신 라이브를 시키고 자기들은 매일 파티나 즐기기위해 (daft punk가 피라미드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하는 대로 사운드가 콘트롤 되는지는 daft punk 외에 아무도 모른다!)
3.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4.이명박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5.app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6.미미시스터즈가 daft punk를 살해하고 대신 공연을 하고 있어서
7.세계 금융안정을 위해
위 문제의 정답을 댓글로 남겨주시는 분께는 푸짐한 상품을 드리지 않으니 그냥 자신이 적은 답을 ()안에 넣고 다음의 글을 읽도록 하자.
daft punk가 () 헬멧으로 심란한 헤어스타일을 감추며 신비주의를 고수하고난 후부터 그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 없다. 특히 thomas bangalter의 아버지 daniel vangarde가 80년대 잘 나가는 프렌치 디스코 프로듀서였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포스팅을 기획했는데 혹시나 싶어 검색해 보니 wikipedia thomas bangalter 페이지의 첫 문장에 바로 적혀있었네. 그런 관계로 포스팅은 여기서 중단한다. 절대 11월달에 포스팅 한 글이 네개밖에 되지 않았고 12월도 벌써 3일이나 지나서 무언가 포스팅을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끼는데 뭔가 포스팅하자니 귀찮은데 마침 daft punk의 헬멧과 관련된 어줍잖은 농담 몇가지가 떠올라 대충 포스팅을 때우려는게 아니다. 자자, 그러니 무성의한 포스트에 흥분하지 말고 (이젠 적응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냥 그 아들의 그 아버지 thomas bangalter가 프로듀싱한 대표곡 ottawan의 ‘disco’와 gibson brothers의 ‘cuba’를 듣는 것으로 훵키하게 포스트를 마무리 짓도록 하자. ‘one nation under a groove’라고 원래 훵키한 곡을 들으면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던가.
esg -ufo
(이 노래를 들으며 본문을 읽으면 더욱 재밌..지는 않다. 그냥 곡 제목이 ufo라..)
UFO가 내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은 뜨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UFO가 내 눈두덩이를 빨간신호등으로 생각하고 잠시 정지해 있을 것도 아니지만, 나는 사자가 나타나면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사자가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는 아프리카 초원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멍청한 동물처럼 (왜 내가 이딴 멍청한 동물의 이름까지 기억해야 하나. 매일마다 뉴스에서 멍청한 인간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라는건 핑계고 혹시 이 동물의 이름을 알고 계신 분은 제보 바란다.) 눈을 감고 UFO를 맞이할 방법과 UFO가 등장한 이후 내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라엘리안 무브먼트에 가입해 둘껄 그랬나. 나, 라엘리안이 감각을 키우기 위해 단체로 벌거벗고 프리섹스한다는 거 좀 하고 싶었는데. bret anderson처럼 심정적인 라엘리안이라 주장해볼까. 적어도 외계인은 지금의 신보단 자비롭겠지. 그보다 자비롭지 않은 건 불가능하니. 아, 근데 그렇다면 UFO가 내려오면 이제 프리섹스의 시대가 열리는건가? 아니,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기쁘다 외계인 오셨네’ 노래 부르며 우리에게 (프리섹스의) 구원을 내릴 외계인을 환영해야.. 라는 생각을 하며 번쩍 눈을 떴다. 하지만 파란신호등이 된 내 눈앞을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던건 UFO 따위가 아니라 유난히 왱왱거리는 소리가 컸던 모기 한마리. UFO는 망상이었고 지구온난화는 현실이었다. 그럼 그렇지. 나날이 빙하 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지구따위 별에 외계인이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지. 혹시 외계인은 어패류일까. 비린내가 날테니 친하게 지내는건 무리겠군. 그들을 칼로 베어 내 바로 먹으면 회가 되는건가. 시덥잖은 생각을 지속하다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뉴스를 봤다. 그곳에는 산업은행 민영화, 교과서 수정, 이명박의 ‘지금 주식 사면 부자된다’ 따위의 기사가 아프리카 초원의 멍청한 동물 가죽처럼 걸려 있었다. 아, 외계인은 먼 곳에 있는게 아니구나. 라엘리안이 괜히 이명박을 지지한게 아니었어. 근데 이명박은 설치류인데, 친하게 지내기 힘든 건 마찬가지로군. 답답한 마음에 밤새 UFO 대신 내 하드안에 착륙한 AV와 조우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무더위에 항거하여 여배우들이 하나 둘 옷을 벗었다. 내 몸의 일부가 지구의 중력을 거슬러 저 멀리 외계를 향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heartsrevolution – 이 글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비중은 매우 적다. 지못미.얼마전 꿈 속에 이명박이 나왔다. 나는 고등학생이고 그는 내 담임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그간 공부한 것을 검사받는데 이명박은 그 자리에서 내일까지 자크 데리다의 책을 읽고 감상문을 써오는 숙제를 내주었다. 나는 서둘러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서점을 찾았다. 내가 찾은 서점은 코엑스의 전체 매장을 합친 것만큼 넓은 곳이었는데 그곳에 자크 데리다의 책은 단 한권 그것도 구멍이 뚫린 채 디스플레이용으로 밖에 없었다. 구멍이 뚫린 책이니 어차피 판매할 수 없지 않느냐, 서점 주인과 흥정을 하고 책을 빌렸다. 집에 가면 감상문을 쓰지 않고 잠이 들 것 같아 다시 교실로 돌아오니 몇몇 아이들이 아직 남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명박이 갖은 첨단 장비를 장착한 군용 헬멧을 쓰고 아이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저주 받은 내 인생. 왜 내가 이자를 꿈에서도 보지 않으면 안된단 말이냐! 이 꿈을 요새 유행하는 두 글자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뭥미!’ 내 순결한 꿈 속에 이명박이 등장한 것도 치욕이지만 저 꿈의 내용은 대체 뭐란 말이냐. 하지만 그간 꾸었던 꿈을 보자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이명박은 좀..) 내가 틈틈히 미투데이에 적어 놓은 그간 꾸었던 꿈들은 대략 이런 내용들이다. ’8비트 게임 도트 그래픽으로 모습이 바뀐 미투데이 회원 연쇄살인’, ‘동성애/치정사건/살인/정치적 음모 등으로 점철된 스페이스 오페라’, ‘박사님과 강명석님과 몇가지 텍스트를 놓고 문화평론(음, 이건 그나마 건전하지만 꿈에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차마 이곳에 공개하기 힘든 야한 꿈들.(사실은 이 분류에 해당하는 꿈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6월달에는 서태지 신곡에 대한 꿈을 꾸었다. 서태지 신곡이 발표된 지금 돌이켜 보니 그때 꿈은 예지몽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서태지의 신곡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 중에 한명이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서태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 사실이 딱히 영광스럽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내가 꾸는 꿈들은 대체적으로 (내용과 상관없이 그 상황 자체가 매우) 괴로운 꿈들이고 좋은 꿈을 꾸기 이해 누군가 내게 ‘자장가’를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heartsrevolution의 ‘digital suicide lullaby’를 떠올렸다.
전세대가 굳건히 세워 놓은 기득권의 굳건한 장벽을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밖에 없는 88만원 세대처럼 최근에 등장한 밴드들 역시 기존 밴드의 아성에 도전하려면 이전보다 큰 댓가를 치룰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전미 음반유통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Recording Merchandisers(NARM)의 통계에 따르면 최근 음반판매는 급격히 감소했고 밴드들의 양극화는 심해졌으나 오히려 새로 등장하는 밴드의 수는 늘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글을 참조하길 바란다.) 이런 상황이니 밴드들은 남들보다 튀기 위해 소망 교회에서 공연을 할 것도 아니면서 무대 위에 번쩍이는 십자가도 올려놓고 뮤직비디오에선 괜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며, 무더운 클럽에서 가면을 쓰기도 한다. (심지어 최근 일렉트로니카 씬에서 가면을 쓰는 건 daft punk의 성공 이후 트렌드가 되었다. 그 덕에 요새 클럽 주변 약국에서는 땀띠를 제거하는 파우더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마스크 패션즉, 이제 밴드가 죽자사자 음악만 하는 시대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콘트롤 하고 프로모션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heartsrevolution은 자신들의 음악, 디자인, 파티 때 쓰는 마스크의 색깔까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 모범사례라 할만한데, 특히 이들이 이미지를 만드는 데 있어 자신들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하는 부분은 작명이다. 우선 밴드의 이름인 heartsrevolution이라는 이름부터 (본래는 hearts와 revolution을 띄어 쓰지만 개인적으론 붙여 쓴 소문자 표기가 더 예쁘다 생각한다.) 이들의 첫 싱글 CYOA(choose your own adventure)와 switchblade ep까지. 이들이 겨우 한장의 싱글과 한장의 ep를 발매했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는 이들의 정규 앨범을 오직 이들의 작명센스를 엿보기 위해 기대하고 있다. 물론 음악도 충분히 기대할만큼 좋지만 일단은 정규 음반이 발매되어야 확실히 뭐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뮤지션들이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것처럼 나 역시 본 블로그를 통해 간지와 찌질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있기에 ‘digital suicide lullaby’에서 떠올린 이미지에 대한 감정적인 수사를 늘어놓지는 않겠다. 그저 ‘digital suicide lullaby’를 듣고 부디 오늘밤은 (정확히 오늘아침은) 달콤한 죽음같은 꿈을 꾸길, 그 바람이 과분하다면 적어도 이명박이 등장하는 꿈은 꾸질 않길 바랄 뿐이다.
switchblade ep
cyoa single
heartsrevolution & crystal castles split single
[#M_ more.. | less.. |예전 블로그에 썼던 꿈 이야기
_M#]

내가 6월 10일 시위에서 처음 느낀 가장 큰 감정은 무력감이었다. 빌어먹게도 이명박의 의도는 적중했다. 이명박이 쌓아 올린 명박산성은 지금껏 내가 보아온 국정운영 중 (하필이면) 가장 기발한 것이었다. 중학교 소풍 때 항상 가던 남한산성을 오르기 직전 느꼈던 피로감이 떠올랐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러한 상상력이 국가 주도하에 현실이 되는 광경을 볼 수 있는 나라 없을 것이다. 어느새 광화문은 헐리우드 스튜디오가 되었고 컨테이너박스는 블럭버스터에 등장하는 몬스터가 되었다. 내가 그 블럭버스터의 수퍼히어로였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언제 몬스터가 휘두른 팔에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려 죽을지 모르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나는 우리 앞에 굳건히 쌓인 컨테이너를 보며 나는 내가 시위에 나온 목적을 상기하기 전에 그 컨테이너를 결코 넘을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에 먼저 사로잡혔다. 이 무력감은 촛불을 들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구호를 큰 소리로 외치는 와중에도 유령처럼 내 어깨 위에 달라 붙어 있었다.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채 이곳 저곳 사람들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다리가 아프고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아마 무력감의 무게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디펜던트 영화가 블럭버스터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상력이다. 전세계적으로 유래없는 블럭버스터급 상상력을 상대로 국민들은 인디펜던트 영화급 상상력으로 대응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인디펜던트 영화의 제작/투자는 민주노총이, 감독은 kyoko님이 하셨다고 한다.) 새벽 1시 경 내가 본 풍경은 내가 지금껏 보아왔던 시위의 풍경 중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이었다. 시민들이 스티로폼을 나르더니 하나 둘 컨테이너 앞에 쌓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일련의 무리들이 일일히 스티로폼을 날랐지만 그 무리는 어느새 컨베어벨트가 되어 마치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쌓는 것 처럼 스티로폼이 운반되었다. 내 뒤로는 삐에로가 풍선을 불어주고 있었고, 내 앞으로는 여중생들이 현 시국에 대한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으며, 벽에는 연신 쥐 그림과 이명박을 욕하는 레이저 태깅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고, 그들 대부분이 그렇듯 무슨일이 일어나도 좋을 것 같다는 대책없는 낙관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그 후 내가 겪은 것은 초현실주의의 세계를 다시 한번 뒤튼 기묘한 것이었다.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인디펜던트 영화의 결말처럼 상황은 반전되었다. 스티로폼이 쌓인 뒤 그 위에 누군가 올라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시민들은 ‘내려와’라고 외쳤다. 적어도 내가 현장에서 들은 ‘내려와’라는 외침은 중의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한 외침는 ‘비폭력’을 주장하는, 굳이 저 컨테이너 박스를 넘어 청와대로 진격할 필요가 있냐는 외침이었고, 다른 외침은 기껏 컨테이너 박스를 넘기 위해 스티로폼을 날라 컨테이너 박스 앞에 쌓았는데 결코 우리를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단체가 올라와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외침이었다. 각기 다른 주장이 같은 언어의 외피를 둘러싸고 스티로폼과 함께 공중 위를 붕붕 떠다니고 있었다. 이 후 빨간조끼를 입은 여자분이 단상위에 올라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뭐라뭐라 했고 몇가지 정황을 통해 스티로폼을 통해 저 장벽을 넘을 의지는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자리를 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른 블로거분들이 해주셨으니 생략한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고,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과반수 이상 뽑고, 광우병 시위에 나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일이다. 우리가 이명박을 뽑은 것은 아무런 비판적 접근 없이 달러가 눈에 그려진 코믹스 캐릭터처럼 경제라는 이미지에 현혹되었기 때문이었고,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뽑은 건 부동산 카지노가 된 한국에서 자신 역시 뉴타운 개발이라는 빅팟을 터트리겠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광우병 시위는 말할 것도 없이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 먹고 광우병에 걸려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결과적으로 이 행위들은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안전과 욕망을 위한 것이다. 지금껏 나는 이 얘기를 솔직히 조금 무서워서 그리고 내가 과연 그러한 말할 자격이 되는지 걱정스러워 하지 않았다. 고맙게도 이정환님이 이에 대한 얘기를 과감히 해주셨고 그에 빌붙어 발언한다다. 나는 많은 시민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학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행인건 이번 시위를 빌미로 적잖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학습하기 시작했으며 그 학습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민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개인적으론 확신할 수 없다. 앞으로 우리의 과제가 있다면 그 학습을 고민으로 이어가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의 종착역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촛불 하나 하나는 진심으로 위대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을 통해 바뀌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 출발은 우리가 먼저 바뀌는 것이다.
나는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쌓아 올린 스티로폼을 타고 올라가 명박산성을 넘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그에 반대한다면 넘지 않는게 옳다도 생각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니까. 그것이 우리가 그들과 다른 점이니까. 하지만 나는 역시 나는 가는게 옳다고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그게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결국 날이 밝아오고 일부 사람들은 스티로폼을 타고 명박산성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 때는 ‘내려와’를 외치던 대부분의 시민들이 자리를 떠난 뒤였다. 반쪽짜리 승리인 것이다. 우리가 저 벽을 넘어설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승리를 위해 모였고 승리하지 않는 싸움은 무력감을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승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체가 ‘우리’가 되지 않으면 승리의 의미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모두가 ‘우리’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도록 암묵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우리가 시위를 통해 학습한 것은 정부는 어지간해서는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과 경찰이 비열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촛불문화제가 말 그대로 문화제의 이름으로만 개최되었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었나. 경찰은 비열하게도 늘 우리가 소수고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즉 약자였을때만을 노려 실적을 올렸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는 5월 31일 저녁 청와대 시위대 폭력연행 사건일 것이다. 청와대 근처의 ‘인도’에서 촛불집회를 가지던 50여명의 시위대가 경찰들에게 구타와 욕설을 들으며 진압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광화문에 머물러 있던 시위대가 청와대로 향하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를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너무도 명확하다.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는 방법은 21세기에도 개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설득의 문제다. 정부가 아닌 우리를 향한 설득이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청와대로 진격하는 게 옳은 것이라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이명박 정부의 비상식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장벽을 넘을 것인가. 다시 우리에겐 6월 10일의 스티로폼같은 상상력이 필요하다.